지대넓얕 2 현실 너머 편을 읽었다.
채사장 책을 좋아해서 이 책까지 포함하면 그의 저서를 모두 읽은 셈인데
그의 글은 매번 충격을 준다.
지대넓얕 2는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파트로 구성된다.
개인적으로 철학, 과학, 신비 파트가 흥미로웠는데
나는 이 중에서도 마지막 장인 "신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신비 파트에서는 인생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며, 다양한 철학적 견해를 소개한다.
죽음을 이야기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설명하는데 '단절, 영생, 윤회, 영원회귀" 이렇게 네 가지를 이야기한다.
단절은 죽음 이후에는 모든 삶이 끝난다고 보는 견해고.
영생은 죽음 이후에 천국으로 간다는 그리스도교식 견해이다.
윤회는 유물론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으로 분리해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영원회귀는 니체에 기반하여 설명한다.
이 중 윤회에 관한 유물론적 관점과 니체의 영원 회귀가 나를 깊은 사색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1. 윤회를 바라보는 유물론적 관점
유물론이 말하는 윤회는 우리가 죽음 이후에 다른 물질로 환원되고, 시간의 영원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체의 일부가 되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유물론의 입장으로 본다면, 우리의 삶은 온전히 내 삶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물질들도 결국에는 다른 누군가의 일부였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어떤 점에서 소중한 것일까, 유물론의 입장에선 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인다. 내 존재는 필연적인 것이리라. 지금의 형체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생명체로 태어났거나 아직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유물론의 입장은 힘이 빠진다. 내 삶이 그냥 필연적이면서도(시간의 관점) 우연한 결과(구성적 관점)라고 한다. 나는 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디서 왔을지도 모를, 나를 이루는 수많은 물질들이 우연히 나를 이룰 때.
나는 지각하고 생각하고 비판하고 수학(修學)할 수 있음. 그것은 우연이지만, 우연적인 삶은 엄청난 확률적 행운이라고. 그러니까. 지금 이 삶을 소중히 여기자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2. 니체의 영원회귀
니체의 영원회귀는 우리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삶이 무한히 반복될 거라는 주장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를 생각하다 보면 지금 삶을 고찰하게 된다.
우리는 대개 미래에서 산다
무슨 말이냐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헌납한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라면 공무원이 되기를 위해 현실을 바치듯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떠한 목표. 그것을 이루기 위해 현재를 양보한다.
이러한 상황에 니체의 영원회귀를 적용하면 끔찍하다.
왜냐하면 무한히 삶이 지속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현재의 순간이 무한히 반복될 것을 의미하고
그렇게 되면 내 삶 전체의 하나의 시간보다 고통스러운 현재의 총량이 많아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의 행복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니체는 영원회귀가 철학적 고찰을 위해서 설정한 가상 상황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하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것의 진위여부는 상관없이 현재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크게 와 닿았다.
칸트의 관념론도 나에겐 크게 와 닿았다.
질문으로 시작하자
나는 살아있는가?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내가 살아있음을 아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근거가 무엇인가? 당신의 감각 기관은 신뢰할 수 있는가? 당신이 보고, 느끼고, 맡보고, 맡고, 듣는 세계는 정확한가?
칸트는 '물자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다.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물자체는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아니라, 인식 너머 그 자체의 현실이다. 내가 보고 있는 모니터, 감촉으로 느끼는 키보드, 내가 듣고 있는 키보드 소리 모두 다 내 감각기관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 수 있고, 보는 것도 다를 수 있고 모든 오감이 개인적으로 차이 날 수 있다. 그럼 오차가 존재한다는 건 모든 인간이 물질 그 자체를 감각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해야 한다. 현실 그 자체를 알 수 있을까? 내가 보는 것이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내가 느끼는 세상과 남이 느끼는 현실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남의 감각과 내 감각 중 무엇이 더 신뢰할 만 한가? 그 무엇도 현실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물자체'란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인간의 지각을 넘어 존재하는 그 자체의 물物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각을 벗어서는 세상을 인식할 수 없을 테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칸트의 관념론을 접하고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절대로 지각 체계를 벗어나서 살 수 없다. 감사한 건 이 지각체계를 활용해서 다양한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지각체계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슬플 테다.
내 인생을 다채롭게 만들어야겠다.
내 가능세계를 늘 열어놓아야겠다.
주저하지 않고 실천해야겠다.
나는 철학이 좋다. 철학하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삶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에 행복하다.
인문학 독서는 너무 행복한 일이다.
어려운 말을 이해하고 내 삶에 적용하고 나아가 미래를 설계하는 일.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