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올 한 해는 두려움과 가슴 벅참이 공존한 해였다.
먼저 평범한 중산층 혹은 서민의 가정에서 태어나 안온하고 어리석게 살았던 내가 사회를 보는 눈을 가지게 된 것이 그 단초인데,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거시적으로 사회의 흐름을 읽는 내 자신에 뿌듯해하며 가슴이 뛰었던 것이다. 허나 이는 역설적으로 공포감을 주었다. 기사를 읽고 생각할수록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 공포감은 사이버 공간에서 더욱 커져갔으며, 가난한 사람마저 재벌을 신봉하게 만드는 사이버 공간의 힘에 나는 암담해졌다.
이제부터 우리가 어떻게 사이버 공간에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지 구체적인 사례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조국 장관 사건과 연계된 정시 확대 담론 상황을 예로 들고 싶다. 2019년, 언론이 가장 사랑(?)했던 정치인은 아마 '조국' 전 장관일 것이다. 검찰 개혁 슬로건을 들고 장관 자리에 앉자마자 야당은 딸의 대학 입학 문제를 걸고 정치권 매장을 시작했다. '조국 스캔들'이 터지기 바로 이틀 전 조국 교수의 '왜 나는 법을 공부를 하는가'를 읽으며 정의에 대해 생각했던 나로선 실망이 클 수 밖에수밖에 없었다. 나는 흑백 논리로 치면 진보를 지지하는 사람이지만, 조국 교수 자녀 부정 입학 논란은 국민들에게 큰 절망을 안긴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정 입학 진위 여부를 떠나, 다수의 국민들은 고등학생이 '대학교 연구실'에서 인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니까 말이다. 이 스캔들은 보수진영의 언론과 정당들에게 큰 칼자루를 쥐어줬다. 언제부터 그리 사려 깊으셨는지 모를 '듣보잡' 보수 위원들은 국민을 이해한다며 진보 진영을 흔들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엄청난 지원( 인적, 금전적 )하에 보수 언론들은 합법적 조국 죽이기에 착수했고 우린 TV를 보든 포털사이트를 보든 유튜브를 보든, '조국'이라는 2글자를 보지 못한 날이 없었다. 댓글들도 이에 동조했다. '종북좌파'라는 프레임 씌우기와 함께. 이렇게 조롱과 비난, 거짓 뉴스, 탈진실만이 가득한 사이버 공간에서,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인 '대입'의 비리 이야기는 군중의 관심을 받기 충분했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가 우리에게 편향되어 노출되었다는 점이다. 정확한 팩트 체크도 없이, 자극적인 헤드라인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동조하며 깨어있는 지식인 인척'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이 담론은 10월에 '정시 확대' 논의로 이어졌다. '조국' 같은 강남권 인사들이 학종에서 판을 치는 마당에, 수시가 가당키나 하냐!!, 모두가 공정하게 같은 조건으로 평가받는 '정시를 확대해야 한다!!라는 의견이었다. 이는 조국 장관 뉴스를 접한 다수의 국민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 왔다. '우리 자식들이 서울대 인턴을 하지 못해도, 똑같은 시험으로 대학 갈 수 있어야 해!'라는 간단명료한 사고를 심어주지 않겠는가. 표면적으로 볼 땐 오점 없는 매력적인 제안이다.
"객관적 통계와 정시 확대 지지층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이 공간에서 선언한다.
'정시는 계층 고착화를 강화시키는 대입 전형이다.'
통계에 입각해보았을 때 정시 전형은 경제적 상층에게 유리한 전형임은 '사실'이다.
그리고 정시 확대를 주장하며 수시를 금수저 전형이라고 비판하는 계층 역시 경제적 상층이다. (이는 언어적 모순이다. 경제적 상층이 금수저 전형을 비판하는 꼴이 되기 때문.) 하지만 단단하고 뭉뚝한 통계는 뾰족한 사건 하나 이기지 못한다. 나는 수시전형이 더욱 공정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것이, 나 역시 학생으로서 수시 전형의 구조적 모순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시 확대는 옳은 길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나는 수능 전과목 절대평가화 및 대학 서열화 붕괴와 대졸자와 고졸자의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이것의 실현 과정의 일환으로, 정시 확대를 반대한다. 정시 확대가 문제가 되는 까닭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정시 확대가 상당 수의 지지를 받는 것은 첫째는 표면적으로 정당해 보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이버 공간에서 선동하기 가장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두가지 견해 중 후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정시 확대는 선동하기 아주 좋은 소재다. 우선 '기득권의 비리'라는 주제는 절대다수의 시민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소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 상층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정시 확대는 언론이 기득권의 지원을 듬뿍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사회에 평생을 몸 담가온 대한민국의 국민은, '형식적 평등'에 대해 무한 신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3박자가 척척 맞으니, 정시 확대 담론은 3단 부스터를 장착한 보기 좋은 불꽃놀이가 되었다. (이 중에 '정시 확대 현 정부가 추진하는 건데 웬 지랄'이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말해두는데, 나는 우리 정부가 지금 정시 확대를 추진하는건 민심을 회복하기 위해 씁쓸하지만 무릅쓰고 진행하는 것이거나, 20:80 구도로의 전환을 통해 상위 20%만 행복한 사회로의 변화를 꿰하는 것이라고 본다. 뭐가 됐든 맘에 안 든다. 부탁인데 흑백논리로 내가 늘 우리 정부의 견해에 동조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사이버 공간에서의 개인은 결코 수평적일 수 없고 평등할 수 없다. 정보 확산조차 자본의 논리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개개인의 사고는 '기득권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언론이 많은 후원과 지원으로 그들의 입장을 넓은 지면으로 채우게 되면, 사람들은 정시 확대의 단점을 볼 수 없다.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정보에 쉽게 흔들리고, '역시 사회는 정의롭게 흘러가고 있다'라고 착각한다. 이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간결히 이야기하면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언론이 진정 사실 만을 말하는가?'보다는 '언론이 무엇을 숨기는가?'이다. '프로듀스 시리즈의 악마의 편집'과 상황이 똑같다. 어떤 연습생이 실수를 했을 때 다른 연습생의 찌푸린 표정을 비춰준다. 우리는 그 연습생 때문에 다른 연습생이 화가 난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다른 장면에서 잘라 짜깁기 한 것처럼 말이다. 맥락과 상황의 이면을 무시한 채 '사실을 재구성한다면 어떠한 이야기도 써낼 수 있다. 따라서 단편적인 기사로 자신의 견해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위험한' 일이 우리 사회에 많이 이뤄지고 있는 까닭은, 신자본주의를 옹호하고 노동자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덮어버리기 좋아하는 보수의 아낌없는 지원 덕에 우리는 보수적 색채의 기사를 쉽게 접하게 되기 때문이고, 또한 그러한 기득권이 망쳐버린 우리의 삶이 그들을 비판할 시간조차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이버 공간에서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