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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재수 생활 고백록 #1 (feat. 현주소 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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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데거 2019. 8. 27.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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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3 때, 스트레스는 잔뜩 받으며 공부는 게을리 했습니다.(게을리하지 않은것 같지만 게을리 한거 같습니다.(?))

뭐 요령이 없었다는 핑계를 대고 싶네요.

(실제로 나보다 공부를 조금한 친구가 좋은 대학에 가고, 죽어라 팠던 사회문화는 말도 안되는 등급이 나와 억울했거든요)

 

그래서 전 지방에 위치한 어떤 대학교에 갈 뻔(?) 했습니다. 

갈 뻔 하다. 라는 표현이 그 대학교를 비하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우려되는데요, 그런 의도가 아니니 찬찬히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수시로 그 대학교를 붙었을 때 아무런 감흥이 없었습니다.

가고 싶은 과도 아니었고(사실은 어떤 과에 가고 싶은지 몰랐습니다), 그 학교는 등록금이 싸다는 것 말고는 메리트란 없었거든요.

그땐, 그 대학에 갈 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수시 발표가 끝나고 3월이 되기 전까지 그렇게 무료한 시간도 없죠. 집에서 빈둥빈둥, 늦게 일어나고 티비보고 유튜브보다 잠드는, 그런 일상이었습니다. 알바를 해야할거 같지만, 전 찌질이라서 지원하는 것 조차 두려웠고, 그냥 집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한 계기로 재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요. 뭐 그 때는 구체적인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냥 그 대학교가 가기 싫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님, 스카이캐슬의 예서를 보고 공부 자극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은 그냥 대학에 가길 바라셨습니다. 주변에 재수해도 성적은 안 오르고 돈만 버렸다는 재수 실패 썰을 자주 들으셔서 그랬던거 같습니다.

 

저도 그런 말을 고3 내내 들었습니다. 재수 시절 성적 오르는 사람은 고3 때 성실했던 애들이라고, 그러니 고3 때 열심히하라고.

고 3 때 저는 수포자였습니다. 그 때 당시엔 "개념은 알지만, 문풀이 어려워"라는 핑계를 댔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냥 수학공부를 안해서 못하는 수학고자였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수학을 무지 잘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고3 때는 수학을 심각하게 못했으니까(평균 5등급, 운이 나쁘면 6등급 )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죠. 다시 한번 방어막을 치지만, 그렇다고 지금 등급이 높은건 아닙니다. 

 

독자 분들은 방금 말한, 제가 우연한 계기로 재수를 해야겠다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실겁니다. 그때가 새벽 2시쯤이었는데,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가서 수학의 정석을 공부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미친 놈인거 같습니다. 그러다가. 내일은 6시에 일어나 도서관을 가겠어!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 집에선 조금 멀리있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합니다. 뭐 계획 그런건 어떻게 짠건진 기억이 안 납니다. 그 땐 정말 빡세게 공부했습니다. 매주 월요일은 도서관 휴관일이니 그 날은 집에서 시간을 버리지 말고 어디든 나가고 나머지 날에는 공부해야겠다 다짐하고 그 이외의 날에는 정말 열심히 했던거 같습니다.

 

 4월 달까지는 평균 12~13시간 공부했던거 같습니다.(제 기준엔 열심히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3월 달 쯤인가. 그 때 당시에 최승필 선생님의 '공부머리 독서법'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릅니다. 고 3 때 국어공부 하나도 안하는데 등급은 높아서 부러웠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왜 제가 국어 시험을 못 보고, 그 친구는 잘 보는지 아주 명쾌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로 도서관 자료실을 돌아다니는게 소소한 재미었습니다. 공부머리 독서법에서 강조하는게 '유명한 책'말고, '재밌는 책'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처음엔 소설부터 시작했던거 같습니다. 책이 참 신기한게, 소설로 시작 했든, 비소설로 시작했든 간에, 결국은 다른 분야의 책을 읽게 하는 마법이 있는 거 같습니다.

 

칼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우주의 광활함을 깨달은 날에는 심장이 뛰어 잠이 오지 않았고, 재미없는 '고전'인 줄로만 알았던 데미안을 두 번째 읽은 날에는 헤르만 헤세의 통찰력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재밌는 소설 책을 읽으며, 이 작품이 드라마화 되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며, 가상 캐스팅을 해보았습니다. 채사장님의 시민의 교양을 읽으면서, 세상을 단순하게 보는 시각을 배웠고, 어느 날에는 다른 책을 통해 세상이 생각보다 단순하게 굴러가지만은 않는다는걸 느꼈습니다. 그렇게 그 도서관에 잘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아마 공시생이었던거 같습니다. 7급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었을겁니다. 대학교가 좋았거든요. (입고 있었던 옷이 과잠이어서 알게 됐습니다) 공시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말 한 마디 섞어보지 못했으니까요. 그에 대해 알 수 있는건 없었죠. 제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슨 책으로 공부하고 언제 쯤 와서 언제 가는지, 집으로 갈 땐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참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메일 노트에 사랑에 관한 고찰을 담은 짧은 글들과, 시를 썼고 혹시라도 누가 볼까 가방속에 숨겼던 참 아픈 기억이었습니다. 좋아한단 말을 못하니까요. 매일 밤 침대에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우면, 그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표준적인 미남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거 같습니다. 키가 크면 좋겠지만 필수 조건은 아니고, 그냥 웃을 때 예쁜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예쁘다는게 참 자의적인 기준이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렇습니다. 저는 예쁜 남자가 좋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동성애자로 산다는건 말이죠. 제 정체성을 언제부터 받아들였는진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차츰. 조금씩 받아들이는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섬유에 물이 스며들듯 자연스레, 저는 제 정체성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는 과정 속에 많은 혼란이 있었죠. 처음엔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다가, 양성애자이길 바라는 둥 끝까지 스스로에게 고집을 피우다 인정해버립니다. 제가 앞에서 섬유에 물 스며들듯 자연스레 받아들였다는 표현은, 부정하며 살았다는 말과 모순처럼 들린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넓은 시각으로 봤을 때, 동성애자임을 부정하는 과정 역시 자연스레 정체성을 확립하는 단계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2편은 내일 쓰도록 하겠습니다.